헐떡거림을 쉬는 곳이 淸凉地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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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2 작성일18-06-04 11:24 조회5,43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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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떡거림을 쉬는 곳이 淸凉地로다
노사께서 상당하여 주장자를 대중에게 보이고 물으셨다.
그대들은 도를 깨닫기 위해 참선을 하고 있다. 도를 깨달으면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그렇게 기를 쓰고 참선을 하는가. 도를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 있으면 한 번 말해 보라. 그 경계가 괜찮으면 이 노인도 한 번 깨달아 보고자 하노라. 말하라. 깨달은 경계는 어떤 것인고?
물음에 대답이 없자 주장자를 가볍게 세 번 치고 게송을 읊으셨다.
廬山煙雨浙江湖
未到千般恨不消
到得歸來無別事
廬山煙雨浙江湖
안개낀 여산 절강의 빼어난 경치
가보지 못했을 땐 한되고 한되더니
그곳에 가보아도 별다른 것은 없고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었네.
중국 여산의 안개 낀 경치와 절강의 동정호는 그 경관이 빼어나 모두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중국사람들은 평생 이곳에 한 번 가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 한다. 그러나 그 경치 좋다는 여산이나 동정호도 막상 가보면 별 것이 아니라 그냥 안개 낀 여산이요, 물결치는 동정호일 뿐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이 주장자를 한 번 보지 못했을 때는 그 일이 한이 되어 반드시 한 번 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한번 보고나면 그것도 별 것이 아니라 그저 이것이로다. 그러니 공부인은 별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별 것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것도 많고, 별아별 욕심과 망상이 다 생기는 것이다. 중생이 중생인 것은 하고 싶고, 먹고 싶고, 듣고 싶은 것 때문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다가 평생을 보내고 마침내 그 업보로 악도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하루 속히 이 별 것 아닌 것을 알아야 헐떡거림을 쉬고 시원한 청량지(淸凉地)에 이르게 된다.
왜 그런가? 사실은 내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주무업(汾州無業)이라고 하는 선객이 있었다. 그는 체격이 당당하고 경전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는데 어느날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마조화상을 찾아갔다. 마조화상은 그의 당당한 체격을 보더니 칭찬 반 농담 반으로 인사를 받았다.
“법당은 웅장한데 그 안에 부처가 안계시는군.”
무업이 이 말에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했다.
“소승은 모든 경전을 읽었으나 마음이 부처라는 말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그 마음이 부처이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닐세.”
그래도 무업은 그 말의 뜻을 잘 몰랐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스님. 달마대사가 전해주었다는 그 심법(心法)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마조화상은 귀찮다는 듯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쓸데 없는 일에 바쁘시군. 잠시 물러갔다 다시 오게.”
무업이 무색해서 물러가려고 일어섰다. 그 때 마조화상이 큰 소리로 불렀다.
“무업!”
무업이 놀라 돌아서자 화상이 물었다.
“돌아보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 말에 무업은 크게 깨닫고 이렇게 아뢰었다.
“저는 경전에 통달해 내 위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오늘 화상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을 헛되게 보낼뻔 했습니다.”
고인이 깨달은 기연(機緣)은 이러 하거니와 대중은 이 주장자의 뜻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雨後春山勢萬般
最憐 翠百雲閑
白雲散處頭頭露
望盡遠山山外山
비온 뒤 봄산은 만 가지로 굽이치고
파릇파릇 산빛 사이 흰구름 한가롭다.
흰구름 흩어지면 산봉우리 드러나니
산너머 산이요 그 너머 또 산이로다.
헐떡거림을 쉬니 이렇게 시원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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