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자료 성림당 월산 대종사



월산스님의 생애와 사상-노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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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2 댓글 0건 조회 8,177회 작성일 18-05-28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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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스님의 생애와 사상/노적사



  월산은 19135월 초하루 함경남도 신흥군 동상면 원평리에서 부친 경주 최씨 흥규 거사와 모친 노씨의 3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종열, 태어날 때부터 상호가 인자하고 미목이 빼어날 뿐 아니라 기품 또한 남달랐다. 월산이 태어난 곳은 절이 많았던 천불산 부근의 사하촌인지라 자연 불심이 돈독했던 부모님의 자애로운 훈육 속에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서숙과 학교를 마치고 새로운 세계를 접했으나 더 이상 진전이 없자 청년기에는 고향을 떠나 망국의 한을 안고 일본과 중국을 돌며 인생에 대한 고민과 방황, 그리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월산은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가치있는 인생은 어떻게 일궈가야 하는 것인지 청년 월산은 혼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명상에 젖곤 했다.

 

  1944년 서른이 갓넘은 나이에 석왕사에서 만난 금오화상을 은사로 득도 출가했다. 월산의 그릇을 단박에 알아 본 금오화상의 배려로 장년의 나이에 인천의 스승이 되는 길로 접어든 이후 치열한 구도의 길로 뛰어들었다. 덕숭산으로 달려가 만공 화상을 만난 월산은 그곳에서 만공화상의 태산같은 무게와 선의 깊이에 감복, 기필코 참선정진을 통해 성불하리라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만공화상에게서 받은 '이뭐꼬' 화두를 월산은 평생 놓지 않았다. 금오화상의 보임처였던 보길도에서 용맹정진을 거듭한 그는 다시 육지로 돌아와 전강화상의 회상에서 선을 참수하는 한편 속리산 법주사와 태백산 각화사,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를 두루 거치며 한암 등 당대의 선지식을 만나 지도를 받으며 본분사(本分事) 해결을 위한 참구를 거듭했다. 특히 경북 청도의 적천사 토굴에서 수행정진을 거듭했는데, 이 곳에서의 수행을 통해 10여년간 도를 구하는 납자로서의 방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중답게 살아보자' 월산은 1948년에는 뜻맞은 도반이었던 청담 향곡 보문 자운 성철 혜암 등과 함께 문경 봉암사에서 결사 수행 중 공주청규(共住淸規)를 만들어 백장선사 등 옛 선지식들의 가르침에 따라 잘못된 구습을 혁파하고 새롭고 올곧은 승풍을 일으키기 위해 힘썼다. 납자들 스스로 청규를 제정해 옛 조사들의 길을 재현해낸 것이니 정신적으로는 불교 정화의 기틀이 여기서 싹트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한국전쟁 전후에는 부산 선암사와 양산 천성산 내원사 등지에서 공부했다.

 

  1953년 은사 금오화상을 모시고 종단 정화불사에 앞장 서 비구종단의 초석을 놓는 일에 정진했고, 참선정신 중에도 시절인연이 닿아 종단을 위해 위법망구해야 할 일이 생기면 기꺼이 총무원장과 교구보사 주지 등 소임을 맡아 헌신하기를 사양치 않았다. 그렇지만 종단의 대소사를 보는 가운데에서도 행역선(行亦禪) 좌역선(坐亦禪)의 자세로 안살림 수행에 간단히 없었으니 이사(理事)에 두루 통찰력을 보였다.

 

  1968년 가을 어느날, 은법사(恩法事) 금오화상이 입적을 앞두고 문도들을 법주사 사리각으로 불러모았다. 한참 동안을 묵묵히 침묵으로 보낸 화상이 이윽고 문도들을 하나 하나 돌아보더니 문득 오른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에 맏상좌 월산이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고 자신의 경계를 표현한 글을 지어 올렸다.

 

  '참모습 깨닫고 보니 부처와 조사 어느 곳에 있는가. 몸 속에 하늘과 땅 본래 감추어 있으니 몸을 뒤쳐 사자후를 하노라. 세우지 않고 버리지 않고 쉬지 않도다.‘

 

  글을 읽은 금오화상은 월산이 이미 개안의 경계에 이르렀음을 알고, "모든 일을 월산에게 맡기노라."며 인가를 발표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가르침을 원하는 월산의 요청에 "무념을 종으로 하는 이 일을 너에게 부촉하노라."고 재차 전법의 의지를 밝혔다. 이윽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 누워 있던 금오화상이 문득 벽에 걸린 불자를 가리키며 월산을 돌아봤다. 자신의 법통이 월산에게 이어졌음을 거듭 증명하는 전법의 순간이었다.

 

  전법 이후 월산은 법주사 조실에 추대되어 총지선원에서 납자들을 제접하는 것을 시작으로 불국사, 금산사, 대승사, 불영사 등 제방 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선풍을 선양했다. 30여 성상을 오로지 위법망구의 자세로 납자의 안목이 되어 정진과 후학 양성에 영일(寧日)이있을 수 없었다. 조실의 지위에 올라 활구참선과 후학양성 등 본분사에 매진하면서도, 종단이 어려울 때면 사부대중의 여망에 따라 원로회의 의장 등의 소임을 맡아 종단발전에 진력했다.

 

  월산은 각 종교간의 화합과 화해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도 앞장섰다. 1970년에는 국내 최초로 불교, 천주교, 성공회, 원불교, 유교 등 각 종교의 대표자들이 모여 창립한 한국종교협의회 초대회장에 취임해 왕성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74년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사찰 불국사의 주지로 취임해 선원과 강원을 개창해 수행도량이라는 가람의 본래면모를 회복시켰다. '앞 절에서는 돈을 벌고 뒷 절(선원)에서는 도()를 이룬다'는 독특한 사상으로 불국사를 영남 제일의 수선 도량으로 일구었으니, 수행도량이 하나 둘씩 관광지로 전락해 가는 오늘의 현실을 돌아볼때 월산의 탁월한 가람경영은 참으로 희유(稀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월산은 수려한 용모와 온화한 음성, 대인의 풍모로 대인관계에도 발군의 면모를 보였다. 한번이라도 그의 지도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지극한 신심과 환희심을 내었으니 자비한 모습과 넓은 용인지심(容人之心)은 누구와도 견줄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항상 염원하던 남북통일을 기원히기 위해 호국의 염원이 어린 토함산 정상에 6,000관의 통일대종을 주조했으니,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대원력은 거대한 울림이 되어 많은 불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1988년 법보신문을 창간해 발행인을 맡은 일은 바른 언론을 통해 중생을 깨우치고자 했던 대자비심의 발로가 아닐 수 없었다.


  월산이 이뤄낸 독특한 가풍은 그의 준수한 외모만큼이나 원만하고 뚜렷한 선지(禪旨)로 나타나고 있었다. 날카로운 선기와 들짐승처럼 과격한 파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소화한 후 나타나는 경지, 그것은 바로 중도(中道)였으니, 월산은 이 중도라는 완성된 모습으로 자신의 가풍을 세간에 드러낸 것이다.

 

  1996년 봄부터 미질을 보인 월산은 비록 쇠한 몸이었으나 옛날과 다름없는 온화한 표정과 언변으로 후학 양성에 박차를 가했으니, 본분종장(本分宗匠)의 위의(威儀)를 성성하게 드날리는 그의 회상에 제방의 납자들이 다투어 운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7년 가을, 노환이 위중해지자 임종게라도 남겨주기를 간청하는 시자들의 요청이 잇따랐다. 월산은 마지못해 한편의 간결한 게송을 남겼으니, 근세 고승들이 남긴 열반송 중 백미로 손꼽히는 그의 임종게는 이러하다.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본래 그 자리는 하늘 따보다 먼저이니라."


  3일 후인 96일 밤 830. 월산은 토함산의 고요 속에 불국선원 염화실에서 만중생을 향해 적멸의 진수를 일깨워 보이는 마지막 사자후를 토해냈다. 월산이 입적하던 날엔 흰 구름 얼기설기 떠도는 하늘이 몹시도 해맑았다.


  사람들은 큰스님 법덕이 높아 가시는 날이 이렇듯 청량한 것이라고들 했다.


  다비식이 있던 날 영결식을 마친 상여가 월산이 오랜 기간 머물며 선풍을 드날렸던 북국선원 앞을 지나 자그마한 골짜기의 다리를 건너는 순간 마른하늘에서 후두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르 보고 '큰스님 가시는 날 꽃비를 내린다'며 덩달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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